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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제암리교회와 수촌교회 프린트  
[2015-08-04 13:06:30]  HIT : 5899  
구분 여행지 소개
성지 사진

 제암리 순국자합장묘

 3.1운동순국기념관 내부

 제암리교회의 조형물

 복원된 수촌교회
성지 소개
 ●  제암리교회와 수촌교회
제암리교회

제암리 사건은 수원 화성 일대의 시위가 폭동화하면서 격렬하게 진행되자 경기도 경무부에서는 헌병과 보병, 순사로 이루어진 검거반을 이 지역에 파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1919년 3월 30일 발안 장날을 기해 수천 명이 참가한 대대적인 만세시위는 제암리의 기독교와 천도교 주민의 주도적 역할로 이루어졌고, 그후 지속적으로 야간 횃불시위를 준비하여 4월 2일, 남포등을 들고 지내산으로 올라가 만세시위를 벌였다.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지도자들에 대한 정보가 3.1독립운동 당시 제암리에 살다가 발안으로 이사한 순사보 조희창에 의해 일본경찰에 그대로 보고되어 3월 30일 발안 장날 시위와, 4월 3일 화수리와 수촌리 시위가 벌어진 후 발안은 주요 경계대상 지역으로 지목되었고 이들의 검거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 제암리사건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은 제암리뿐 아니라 수촌리, 고주리, 발안리, 장안면 등 화성 일대에서 전체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그 때 각 마을에서 학살된 이들의 대부분은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었다.  동학혁명 이후 전해진 천도교와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 전해진 기독교, 이 두 종교의 교인들이 민족운동 세력과 제휴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를 알게 된 일본은 이 지역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었던 기독교, 천도교 세력을 근절하려 하였고 제암리 교회에서 그들을 모아 놓고 학살을 감행했다.  


1919년 4월 15일, 15세 이상의 제암리 마을 남자들을 모두 모이라고 알린 일본군은 마을 남자들이 모두 모이자 교회의 문과 창문을 모두 잠그고 집중 사격한 후, 석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또 제암리 마을의 33가구도 2채만 남긴 채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 때 교회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들중에는 제암리교회를 세운 안종후를 비롯해 제암교회 지도자 홍원식과 10여 명의 교인들이 있었다. 


 

수촌교회

제암리에서 그리 멀지않은곳에 위치한 수촌리 역시 3.1독립운동때 제암리 학살 사건과 같은 맥락에서 일본에 의해 만행이 저질러진 곳이다. 

수촌리사건은 4월 2일 장안면과 우정면 주민들이 합세하여 벌인 격렬한 독립만세 시위가 그 도화선이 됐다. 4월 3일 오전 장안면 수촌리와 석포리 주민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로 몰려가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우정면 주곡리 일대의 시위대와 쌍봉산에서 합류하여 집회를 가진 뒤 우정면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면사무소가 파괴된 것은 물론 주재소가 불에 타고 일본인 순사까지 살해를 당하자, 일본군 검거반은 수촌리를 그 진원지로 파악하고, 그 곳의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전교사 백낙열과 감리교 전도사 김교철 등을 체포하기 위해 4월 5일 새벽 3시 반경에 수촌리를 급습하였다. 

 

이 과정에서 검거반은 천도교 전교실과 수촌교회 예배당은 물론 민가에도 불을 질러 마을 전체가 소실되었다.  이 때 수촌리에서는 14명의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 옥에 갇혀야만 했다. 

수촌교회 교인이었던 그들이 옥에 갇히고 일본군이 마을에 방화했을 때 수촌교회는 전소됐다.  그러나 1922년 4월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8칸의 초가 예배당을 새로 세웠고 1932년 1월 수촌리에 교회를 세워 지금의 자리에 세워지게 됐다. 옛날 수촌교회는 현재의 예배당 옆 자리에 복원돼 있다 

 


주소
 제암리교회 :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길 50
 수촌교회 :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 674
전화번호
 제암리교회 : 031-353-0031
 수촌교회 : 031-351-2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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